≪눈이 부시게≫
눈이 부시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은
때때로 기억에서 나온다.
그 기억은 짧지만 강렬하게, 그리고 선명하게 현재에 날아든다.
이 드라마를 앉은자리에서 절반 가까이를 봤다. 보는 동안 혜자의 삶에 들어가 한참을 울었고, 또 빠져나온 혜자의 삶에서도 한참을 울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까지 잘 짜여 공감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드라마가 있을까 싶다.
B. 환상, 과거
어릴 적, 가족들과 바닷가에 놀러 간 혜자는 우연히 금색 시계를 발견한다. 놀랍게도 이 시계는 내가 원하는 과거로 갈 수 있다. 초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한 혜자는 신기한 마음에 시계를 여럿 돌려본다. 그런데, 돌린 시간만큼 혜자는 또래보다 많이 성숙(?)해진다. 초등학생 때도 엄마랑 목욕탕을 가면, 나이를 증명할 수 있는 증명서를 들고 다녀야 했을 정도다.
B. 환상, 과거
졸업한 방송반 엠티에서 혜자와 준하는 처음 만난다. 그 이후로 동네 요양원 건설 반대 집회에서 준하를 다시 마주하고, 그 이후로 계속 그를 만나며 호감을 키워간다. 그러던 중, 혜자의 아빠는 집에서 나간 지 얼마 안 돼 운전하던 택시와 트럭이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혜자는 급하게 시계를 찾아 그 순간, 아버지가 그 사고를 피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한다. 아무리 불러도, 아무리 달려가도, 또 그 옆에 아무리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도,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번을 했을까... 몇 천 번을 시도해도 안된다고 한 혜자 앞에 준하는 몇 억 번을 시도해서라도 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시도한 끝에 혜자는 드디어 아버지를 그 사고로부터 구한다.
B. 환상, 과거
하지만 시계를 돌린 대가로 혜자는 78세 노인으로 변해버렸다.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던 혜자는 점차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킨 대가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준하의 앞에서는 당당하지 못하고 자신을 혜자의 이모라 소개한다. 준하 또한 갑자기 사라진 혜자에 대한 그리움으로 힘들어한다.
그러다, 혜자는 노인 홍보관에 가고 그곳에서 예상치도 못하게 준하를 마주한다. 기자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준하는 복지원 '이 팀장'으로 노인들에게 노래를 부르고 물건을 팔고 있었다. 혜자는 준하를 걱정하며 자꾸만 준하의 삶에 관여하려 한다. 잊을만하면 자꾸만 옆에서 혜자의 일을 가지고 들쑤시는 통에 준하의 마음은 점점 복잡해져만 간다.
혜자는 효자 홍보관에서 노인들을 상대로 보험 사기를 계획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홍보관에서 권유하던 사망보험에 든 이들만 데리고 야유회를 계획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보험에 들지 않은 이들은 이에 의구심을 품었다. 또 이에 반대했던, 준하는 홍보관 지하에 갇히고, 혜자는 준하와 홍보관 사람들을 구한다.
A. 실제, 과거
홍보관 사람들을 구하고 멀리 떠나온 바다에서 잠시 쉬던 틈에, 혜자는 갑작스럽게 기억을 되찾는다. 혜자는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인 혜자를 만나 진실을 맞닥뜨리게 된다. 사실 혜자와 준하는 부부였다. 혜자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준하와 연애하고 결혼했다. 당시 준하는 사회부 기자로 드러내서는 안 될 진실들을 마주하고 보도했다. 결혼기념일 날, 일찍 집에 들어오겠다는 준하는 죽음으로 돌아왔다. 준하의 빈자리를 애도할 틈도 없이, 어린 아들을 홀로 키워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아들은 다리 한쪽이 불편했다. 천진난만했던 그녀는 그런 상황에서 점점 차갑고 강하게 변해갔다.
C. 실제, 현실
실제 혜자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었다. 기억의 혼돈으로, 실제와 환상 사이를 오가며 준하와의 기억을 되새기고 있었다. 상태가 악화되어 며느리는 물론 아들까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때, 눈이 내리고 혜자는 아들을 위해서 눈을 쓸었다. 이때까지 다리가 불편한 자신을 위해서 눈을 쓸어준 건 혜자였음을 알게 된 내상은 그동안의 희생에 원망이 눈 녹듯 사라진다. 그리고 혜자는 자신의 눈이 부신 날은 그 어떤 특별한 날도 아닌, 그저 그 매일매일이었음을 고백한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누렸던 그 순간의 모든 공기, 냄새까지, 눈이 부셨다. 일생을 회고하던 그녀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준하를 만난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이 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곧 과거의 나를 잃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만큼 한 사람이 경험하고, 그로부터 감정을 느끼고, 또 이를 기억하는 과정들은 나를 만든다. 이 드라마의 반전은 바로 혜자가 알츠하이머라는 점에 있었다. 그녀는 모든 기억들을 잃어갔다. 하지만 모든 걸 잃어가도, 그와의 기억만은 생생하게 살아남았다. 기억을 점차 잃어가는 그 순간에도 준하와 함께 했던 기억들은 편집되어 재생되었다.
그만큼 준하와의 기억은 모든 걸 다 잃어도 결코 잃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을 것이다. 혜자의 긴 삶에서 준하와의 짧은 순간은 그녀의 인생을 끌고 갈 만큼 강렬했다. 그리고 그 기억은 그녀를 살아가게 했다. 기억을 잃어가는 그녀가 만들어낸 그와의 편집된 인위적 기억은, 그 아이러니함에서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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