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서의 「당신의 노후」는 국민연금과 관련해 국가가 국민을 합법적으로 처리하는 인위적 죽음에 대해서 다뤘다. 인위적 죽음을 자행할 수 있었던 것은 이는 시간의 선형성에 대한 것이 전반적으로 공유되거나 공감되지 않아서이다. 시간의 선형성이란 무한한 직선적 선형성이 아닌 언젠가는 끝이 있는 유한적 선형성이다.
죽음에 대한 논의는 '삶이 유한하다'라는 전제 아래에서 출발한다. 삶과 죽음은 분리 불가분의 관계이기에 이 둘에 대한 동시적인 논의가 필수적이다. 첫 번째는 유한하기에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두 번째는 유한한 삶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 인지이다.
1. 어떻게 살 것인가
박민규의 「근처」는 간암 말기의 호연이 모북으로 내려와 삶을 마무리하는 모습을 그렸다. 그의 죽음 앞의 삶에서 순임은 그를 살아가게 했다. 윤성희의 「어느 밤」도 가족들과의 관계가 단절된 덕선에게 청년은 그녀의 삶을 이어줬고,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다니엘 블레이크와 케이트는 지속적으로 서로의 삶 안에 들어왔다. 타인과의 관계는 더 나아가 연대로 확장된다. 현대 사회가 건강하지 못한 것은 이기적 본성에만 충실해 연대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타인의 삶에는 무섭도록 냉정하고 무관심하다. 자살의 또 다른 말이 사회적 타살인 이유이다. 한국 사회의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단연 1등이다. 사회적 소통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소속감이 있다면, 가족의 일원, 회사의 일원, 어느 공동체의 일원으로 죽음에 대한 관념은 실제로 실행되지 않는다. 그런데 사회적 교류가 단절된 상태에서는 죽음에 대한 관념이 지속적으로 조금 더 구체화된다. 어쩌면 연대는 삶의 의미를 더해주기도 하지만 삶의 조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을 둘러싼 관계가 지속적이고 튼튼해야 정신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연대 이외에 삶을 구성하는 다른 요소는 무엇일까?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는 자기중심적 이기적 본성의 일, 놀이, 사랑을 꼽는다. 이를 보편적 본성으로 정의하고 이들을 자신의 삶의 의미에 따라서 얼마큼의 비율로 어떻게 종합할 것인지를 개인의 특수적 본성으로 정의한다. 그래서 각자의 자기 본성을 어떻게 또 얼마나 잘 발휘하며 사는지를 인생 전체의 자기표현 과정으로 본다.
자기표현이란 '자기결정권'과도 같은 말이다. '자기결정권'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을 결정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결정'이라기보다는 '사회 결정'에 순응하며 산다. 이는 '구조주의적' 관점과 연관 지을 수 있다. 구조주의란 '사회구조'가 한 개인의 삶을 지배적으로 결정하고 만든다는 이론이다. 크게는 사회의 구조, 회사의 구조, 학교의 구조, 작게는 가족의 구조, 그 이외에도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구조적인 중요성 강조한다. 특히나 한국 사회에서는 나이에 맞는 사회적 용인의 정도와 그에 맞는 성취의 정도가 명확하다. 사회구조는 개인의 영역으로 들어와 개인을 형성하지만, 개인의 특수성을 사회구조의 획일성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사회구조의 영향 아래에 개인의 중심을 바로 세우고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과정이 의미 있는 삶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사회의 뜻과는 다른 길이지만, 자기 자신이 그 일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의 삶은 의미 있는 삶이 된다. 삶의 의미를 삶 안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삶의 구성 요소를 개별적으로 살펴보면 '일'과 '놀이'는 다른 범주 같아 보이지만 이 둘을 잘 병합하고 배합해야 삶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 먼저 일은 내 인생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맞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은 인생의 절반을 즐겁지 않게 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놀이를 확대하면 휴식의 개념에 가깝다. 어떻게 일을 잘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많이 하는 반면에 어떻게 잘 놀고, 쉴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거의 하지 않는다. 놀이를 죄악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하는 듯하다. 그래서 가끔은 일과 놀이를 혼동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일과 관련된 고전적이며 극단적인 질문은 '잘하는 일을 할 것인가? 좋아하는 일을 할 것인가?'이다. 잘하는 일은 '일'과 관련되어 전문적으로 그 분야에서 훈련된 경험을 가지고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말한다. 좋아하는 일은 '놀이'와 관련되어 그 행위 자체를 즐기는 것을 말한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놀이를 일로 삼겠다는 것이다. 즐거운 행위 자체를 전문적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 둘은 분리하여 적절한 균형 아래에서 배합해야 한다. 균형을 잘 맞추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많이 정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끊임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일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게 탐구할 기회를 주고, 돌아보고, 그것들을 적절하게 적절한 때에 자기 자신에게 제공해야 한다. 그래야 균형 있는 좋은 삶이 된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사랑이다. 사랑의 범위는 나에서부터 확대되어 친구, 연인, 가족 그리고 사회로 나아간다. 사랑의 대상을 가진다는 것은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이 자신을 둘러싼 친구, 연인, 그리고 사회를 사랑하고 연대하는 방법이다. 즉,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그 중심에 자신의 중심이 똑바로 서있어야 자신을 둘러싼 관계들을 잘 유지하고 사랑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랑받는 것에도 자기중심이 바로 서야 사랑을 적절하고 꼬임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2. 어떻게 죽을 것인가.
삶의 결정권은 삶의 마지막에서도 발휘되어야 한다. 조금 더 면밀히 말한다면 자신의 삶의 마지막을 결정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일 수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 죽음은 대개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이 되기 때문에 가능한 삶에서 떼어놓고자 전문적인 병원이나 기관에 자신의 목숨을 맡긴다. 자신의 상황을 충분히 검토하지 못한 상태라면, 그야말로 자신의 삶의 마지막을 결정하는 사람은 의사이다. 병원 침대에서 여러 개의 줄을 매달고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연명치료를 내가 원하던 삶이 아닐 수 있지만 의식이 사라진 후에는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삶을 끝맺음하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죽음 앞에서의 판단은 역으로 앞서 논의한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기준을 찾을 수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단순히 신체적으로 잘 기능하는 것을 넘어서 '자기결정권'을 행사해 주체적으로 자기를 표현하고 관계를 맺는 것까지 확장된다. 그렇다면 ‘죽음’의 정의는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보편적 ‘죽음’의 정의는 신체의 기능이 멈춘즉, 심장이 뛰지 않고 폐가 숨을 쉬지 않는 심폐정지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심장이 뛰고 폐도 숨을 쉬지만 주체적으로 ‘자기결정권’을 수행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과연 살아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가? 생명 연장을 위해서 매달아 놓은 여러 개의 줄 앞에서는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지키기 어렵다. 보편적인 자기중심적 이기적 본성과 이타적 본성은 당연하고 특수적인 비율의 배합은 고려할 수 없다. 개인 대 개인의 관계, 더 나아가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고립되고 단절된다. '인간'적인 본성을 지킬 수 없는 삶은 살아있는 것일까? 죽은 것일까? 이 상태를 셸리 케이건에 「죽음이란 무엇인가」의 책에 따르면, 이 상태는 '육체'는 살아있지만, 하나의 '인간'으로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유성호의 「나는 매일 시체를 보러간다」에서는 우리에게 연명치료에 대한 거부권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죽음에 대한 결정권을 스스로 행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줄에만 의지하며 사는 삶에서는 삶의 가치를 찾기 힘들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 자체를 삶에서 분리한다. 죽음을 ‘삶’의 부정과 ‘존재’의 부재(不在)로 인식한다. 그러나 죽음은 ‘삶’의 긍정과 ‘존재’의 실체를 명확하게 해주는 요소이다. 만약 영생(永生)하여 삶이 무한히 펼쳐져 있다고 상상해보자. 사는 것이 마냥 긍정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죽음, 그 삶의 유한성 안에서 의미 있는 행위들은 삶을 더 밀도 있고, 가치 있게 만들어 준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와 같다. 죽음은 현재성을 강조하며 현재에 내가 의미 있게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3. 결론: 삶의 태도
죽음이라는 것은 삶의 유한성을 전제하고, 그래서 유한한 삶 안에서 삶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어떻게 발현하면서 살아야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는 삶의 태도에서 가장 중요한 '자기결정권'으로 귀결된다. 얼마나 내 인생의 주체로 사는가이다. 스스로 선택한 인생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할 수 있으면 그것이 의미 있는 인생이다. 사회가 만들어놓은 구조적 시스템 아래에 자신을 맞추는 것은 남들이 보기에 성공한 인생일지 몰라도 자신이 그렇게 살고자 하지 않았고, 또 그게 옳은 방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의미 있는 인생이 아니다. 주체적으로 사는 것은 선택을 동반한다. 선택을 한다는 것은 선택하지 않은 것을 유보하거나 하지 않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각자가 하는 선택에 대해서 가치를 부여해준다. 마치, 내가 짧은 시간만큼만 여행을 한다고 하면, 내가 보고 싶고 먹고 싶은 것들 위주로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 자기결정권은 삶의 마지막에서도 발현되어야 한다. 삶을 매듭짓는 가장 중요한 순간, 병원의 의사나 가족이 아닌 자신이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끝맺음 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죽음은 본성적으로, 또 누구에게나 기피하고 싶고 부정하고 싶은 존재이다. 그러나 죽음과 삶은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삶의 끝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이 주는 삶의 유한성으로 나는 과연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삶을 관통하는 태도는 ‘자기결정권’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탐구하고 스스로 기준을 세워가며 자신이 가치 있다고 판단되는 일에 주도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 과연, 이 사회에서 얼마나 능동적으로 결정 내리며 살아왔나 반추했다. 그저 남들 보기에 좋은 것, 사회가 옳다고 주입해왔던 것에 아무런 비판 없이 수동적인 태도를 보였을 때도 있었다. 내면이 흔들릴 때도 있겠지만, 흔들리면서 나만의 기준을 잡아가고 싶다. 더 나아가서 내가 옳다고 믿는 방식이 나를 그 안에 가두지 않기를 바라며, 기준이 아집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 나의 주변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내가 연대하는 사회가 더 풍요로워지고 따뜻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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