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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노후, 박형서(2018)_이 꽃 같은 존재들

독서/인문 | 소설, 에세이

by stack.er 2020. 11. 15.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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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서, 당신의 노후 출처, YES24

당신의 노후는 멀지 않은 미래의 우리 노후에 대해서 비현실적이고 아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미 만 65세 이상의 고령비율이 15%를 넘었다. 한국은 고령화사회에서 고령사회로 바뀌는데 17년이 걸렸고, 고령사회에서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는데 9년정도 걸릴 것이라 예측한다.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을 정도로 아주 빠른 속도이다. 태어나는 아이들은 점점 줄어들어 출산율이 1명도 안되는데 이미 사회에 나와있는 이들은 빠르게 늙어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은퇴를 할 즘에는 국민연금이 바닥난다는 말은 흔히 들려오고 있으며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만연하다. 청년들은 지금의 노인들만큼 누리지 못하는 사회의 현실을 부정하고 있으며 그런 그들을 부양해야하는 부담감에 사회의 갈등은 점점 깊어지고 있다.

 

장길도는 국민연금공단을 보름 전 은퇴하고 폐렴을 앓고 있는 아내의 곁을 지키고 있다. 그러다 아내 한수련이 34년 전 자신 몰래 국민연금을 들어놓은 것을 알게된다. 수련은 만 79세의 비생산층에다 연금 수급은 곧 100%에 다달하고 그의 남편은 공무원연금을 받고 있다.적색리스트이다. 국가는 국가에 생산성을 가져다오는 생산가구인 청년층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비생산가구인 노인들을 적색리스트에 올려 합법적이며 비밀리에 살해한다. 이런 살해를 주도하는 기관은 국가연금공단이다. 곧 살해될 위기에 처해있는 수련을 구하기 위해서 장길도는 아내의 존재를 위협하는 담당 공무원들을 하나하나 처리해나간다.

 

장길도가 그의 아내 한수련을 지키기 위해서 사투하는 내용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지만 장길도가 몸 담고 있었던 국민연금공단의 공무원들이 저지르는 비참한 살해 에피소드들이 옴비버스식으로 구성되있다. 이 글에서는 먼저 국민연금공단의 공무원들의 노인 살해 동기를 국가와 개인의 입장에서 분석했다. 그런 그들에게 삶의 마지막을 무참히 짓밟힌 노인들의 입장에 서서 타인에 의한 '인위적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원론적으로는 죽음의 반대편인 삶, '인간' 그 자체의 존재와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피할 수 없었다.

 

정년이 만 65세로 늘어났다 하지만 대다수 이 나이까지 회사에서 일을 한다는 것이 어렵다. 그들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생산성을 상실했다. 그런 이들이 회사의 밖으로 나와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가 모이는 공원에 가서 시간을 축내고 오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 더 큰 문제가 있다. 이 소설 속에는 청년이 노인을 향한 혐오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지하철 탑승과 관련된 상황을 보면, 노인들은 지하철을 무상으로 탑승하지만 청년들은 그들의 무상탑승의 금액을 메꾸기 위해서 거의 밥값과 맞먹는 돈을 대중교통 요금으로 지불해야한다. 또한 노인들의 값싼 노동력 때문에 청년들의 일자리 난도 더욱 심해졌다. 청년들은 경제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국가의 경제를 책임져야하는 아이러니한 상황들이 자꾸만 펼쳐지는 것이다. 그래서 청년들이 나이가 든 사람들을 혐오하고 사회에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했다. 인형술사와 장길도의 대화에서처럼 나이가 든 사람은 젊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어떻게 맞아서 나올지 모르는 것이다. 이건 청년들의 개인적인 인격 문제를 탓할 수만은 없는 부분이었다. 이건 사회의 문제였다. 사회의 시스템이 그 두 부류의 계층이 서로 상생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닌 청년이 노인을 무조건적으로 부양해야하는 부담을 지움으로서 노인을 향한 갈등을 더욱 키운 것이다. 증오와 혐오는 개인이 아니라 다름아닌 사회가 만들어낸 부산물이였다.

 

그렇게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증오와 혐오의 배경 위에 이 소설 안의 국가는 아주 합법적으로 또 합법적인 조직을 통해서 노인들의 죽음을 주도하고 용인한다. 그리고 그 일을 수행하는 공무원들은 이에 반기를 들기는커녕 이를 '애국심'이라는 명목 아래 자신들이 한 일을 대단하고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국민연금공단에서 나이가 든 사람들을 처리하는 공무원들의 이름은 양파, 곱등이, 인형술사이다. 현실 사회에서 흔히 사용되는 이름이 아니다. 이 별명과도 같은 그들의 이름은 그들의 또 다른 페르소나이다. 이 이름을 사용하는 순간만큼은 자신이 살인자가 아니라 국가의 명령에 정직하게 순응하고 애국심을 실천하는 중이었을 것이다. 특히 곱등이는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된 것처럼 살해의 행위를 자신의 유희적 수단으로 여겼다. 생명의 끝을 자신이 마음대로 진두지휘할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 이에 이를 더욱 부추기고 장려하는 국가의 시스템은 점점 더 그를 괴물로 만들었다. 여기서 나는 개인의 순응을 비판하고 싶다. 국가의 명령과 지시 아래 그들의 노인을 향한 살해가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 어떤 경우에도 살해는 용인될 수 없다. 국민연금공단의 공무원은 한나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속의 아이히만과도 같다. 아이히만은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계획 실무를 담당했다. 그러나 그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상관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시킨대로 했을 뿐이라며 자신은 전혀 잘못한 것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이에 한나아렌트는 악의 평범성(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자신이 기계적이고 당연하게 여기고 행하는 일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는 무사유, 그자체가 바로 악이라는 점이다. 국민연금공단 공무원들은 국가의 명령에 순종하는 행위는 사람을 살해하는 명백한 ''이라는 생각을 했어야했다. 개인의 무사유와 결핍된 비판이 얼마나 참혹한 일을 가져다 오는지 반추했어야했다.

 

이 모든게 가능했던 것은 크게 보면 공감 능력의 결핍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의 선형성에 대한 공감이 사회전체적으로 공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청년이 되고 그 청년은 노인이 된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역사를 망각한 채 말이다. 이 사회의 사람들이 인간 시간의 당연한 선형성에 대해서 인지했다면 그들을 바라보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조금의 제지를 걸었을까? 그들은 살해를 그만두었을까? 40대의 연금이사도 자신의 아들이 지하 단칸방에서 매트리스에 끼어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단 한번이라도 해봤다면 장길도를 비롯해서 그 많은 죽음을 묵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사회는 생산성도 없으면서 연금만 축내고 있는 노인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인위적 죽음을 자행하는 곳이다. 죽음 앞에서 어떠한 자비도 없으며 오히려 죽음은 그들의 늙음과 병에서부터의 자유이며 죽음의 행위로 그들의 품위를 유지했다고 생각하는 사회이다. 그들은 나의 삶의 마지막을 마무리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갑작스럽게 나의 삶의 끝을 공격해온다. 진정으로 품위있는 죽음이란 무엇일까? 내가 나의 삶을 되돌아보고 그 끝에서 의미를 찾아보는 것이 진정한 품위 아닐까? 유발 하리리의 호모데우스에 의하면 앞으로의 인류의 목표는 불멸, 행복, 신성이다. 그 중 불멸은 우리의 인간의 생명이 기술적으로 무한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죽음이라는 그 끝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오는 것을 의미한다. 자의로서는 죽지 않아도 될 환경이 펼쳐지고 있지만 이를 감당할 수 없는 국가가 인위적으로 죽음을 조작하고 침범할 수 없는 개인의 생명에 함부로 발을 들이고 있다.

 

이는 마지막으로는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곱등이는 과거 119대원으로서 사람을 끝까지 살리고자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는 생산성과 효율이 없어도 살아야 마땅한 존재라는 것이다. 존재 자체에 대한 아름다움.’ 이는 책 안의 꽃집을 운영하는 방씨에게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방씨는 자신의 이상한 이름 때문에 일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았다. 그런 그녀가 꽃을 보며 한 말을 인용한다. ‘꽃은 아름다웠다. 꽃이라 부르지 않아도 아름다웠다. 꽃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꽃의 이름은 형편없었다. 때로는 꽃이라 부르지 않느게 더 아름다웠다.’ 노인을 노인이라고 명명하지 않는 게 아니 명명하지 않아도 인간 그 자체는 아름답다. 인간은 꽃과 같은 존재이다. 그 자체를 존중하고 공감한다면 이 사회는 이 소설 속처럼 디스토피아적 세계가 펼쳐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시간의 선형성을 인정한다면 상생의 사회로 성장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꽃이 어딘가에서 아무도 모르게 짓밟히지 않고 온 들판에 만연하게 피어있는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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