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의 사회를 향한 솔직함은 다큐멘터리적인 전개의 정직함으로 드러나고 그 안에서의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자꾸만 일깨운다.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는 일생을 목수로 살아오다가 정신질환을 앓은 아내를 보살핀다. 그러나 아내가 세상을 떠나며 그는 평생 모아둔 돈이 바닥난다. 더욱이 자신도 가지고 있던 심장병 질환이 악화되면서 일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하지만 질병수당 심사에서 탈락한 다니엘은 여러 차례 고용센터와 연락을 하고 방문하지만 까다로운 절차와 수단에 좌절하고 만다. 질병수당의 항고를 준비하며 고용수당을 받지만 주 35시간 이상, 고용을 위한 투자를 해야 하며 또 이를 증명해야한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사용할 줄 모르는 그는 연필로 꾹꾹 눌러쓴 이력서를 가슴에 품고 일할 자리를 구하러 다닌다. 그러던 중 그는 런던에서 이사 온 두 아이의 엄마 케이티를 만나게 되고 그 둘은 서로를 의지하며 삶을 이어나간다.
[질병 수당 자격시험에서 떨어진 다니엘 블레이크]
영화는 질병 수당을 얻고자하는 다니엘에게 평가 담당자는 지속적으로 질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혼자서 산책을 할 수 있는지부터 양말을 머리끝까지 올려서 신을 수 있는지 등 그의 심장병과는 관계없는 질문이 계속된다. 이상한 질문을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질병 수당에서 탈락하고 이에 항소하기 위해서 센터에 연락을 취해보지만 1시간이 넘는 동안 지루한 왈츠를 들어야만 했다. 답답한 나머지 센터를 찾아보지만 인터넷으로 사전 신청을 하지 않으면 상담이 어려웠다. 인터넷의 근처에 가보지도 않은 그는 여럿의 도움을 받으며 우여곡절 끝에 신청을 하지만 결정은 쉽사리 번복되기 어려웠다. 그가 질병 수당 질문에 답하는 장면, 긴 통화 연결음, 처음 사용해보는 인터넷 등은 이 영화 안에서 유머적 요소로 작용하지만 이 상황들이 너무나 사실적이고 난감한 상황인 탓에 이는 차갑다 못해 ‘냉소적’ 유머로 흘러간다.
질병 수당 평가 담당자는 어떤 기준에서 그를 탈락시켰는가? 과연 그 담당자는 그럴만한 책임과 능력을 가진 사람인가? 또한 이 시스템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충분한 고려와 그에 따른 배려가 있었는가? 항소를 위해 연락을 취하면서 그는 복잡하고 난해한 시스템의 벽에 부딪혔다. 그들의 입장에서 조금만 생각해봤다면 과연 온라인 신청이라는 한 가지 방법만을 고수했을까? 주류의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한 자는 자연스레 비주류로 분류되었고 이는 그들이 사회의 주류에 적응하지 못하는 패배자로 만들었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은 정작 그 시스템이 필요한 사람들을 배제시켰다. 마치 잘 익은 포도를 올려다 놓은 채 가시 많은 울타리를 높게 둘러싼 듯하다. 원칙만 있고 배려는 없는 시스템 아래에서 ‘복지’라는 이름으로 포장해놓은 시스템을 비판하고 싶다.
[케이티의 통조림]
케이티는 자신이 살던 집에서 ‘보복성 퇴거’를 당해 런던에서 뉴캐슬로 이사를 온 인물이다. 이유는 살던 집의 열악한 상황을 견디지 못한 아이들이 앓자 집주인에게 건의 한 것 때문이었다. 쫓겨난 그녀는 노숙인 쉼터에서 2년을 두 아이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런 그녀에게 정부는 조금의 지각도 용납하지 않았다. 몇일동안 과일로 생명을 연명하던 그녀는 생필품 지원을 받으러 간 곳에서 통조림을 따 허겁지겁 먹는다. 이곳저곳 일자리 장소를 구해보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자 그녀는 급기야 극단적으로 자신의 몸을 팔러 다닌다. 결국 두 아이와 자신의 생계에 있어 돈이라는 수단 앞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코코넛과 상어]
다니엘은 딜런에게 뻔한 질문을 던진다.
“코코넛과 상어 중 사람을 더 많이 죽이는 것은 무엇일까”
얼핏 듣기에는 상어가 정답일 듯하지만 정답은 코코넛이다. 코코넛은 수요가 많은 만큼 재배하는 사람들의 노동도 많이 들어간다. 이는 곧 자본을 대변한다. 자본이 사람을 죽이는 시대이다.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의 경계가 더욱 확실해지고 그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복지를 가장해 자본의 단면을 숨기고 있다. 돈이 없으면 기본적인 삶의 영위가 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누구에게로 시선을 돌려야 하는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다니엘 블레이크와 사람]
다니엘은 그럼에도 사람과 연결되어 살았다. 사람은 사람과 연결되어 삶을 살아간다고 말하는 듯 했다. 이웃의 택배를 받아주고, 이웃들과 밥을 나누고, 케이티의 집을 수리하기 위해서 이것저것 공구를 챙겨오던 모습, 그녀가 돈이 없어 전기요금을 못 내고 있을 때에는 작은 돈이지만 전기요금을 내라고 돈을 올려다 둔 모습, 그리고 그녀가 절망하는 그 순간에 그녀의 손을 잡았다. 우리가 진정으로 생각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이곳에 있다. 결국 이웃, 정, 연대, 사랑, 우리가 흔하다 생각해서 놓쳐버리기 쉬운 본질적 가치는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개인의 범위에서 확대하여, 사회 또한 개인과의 연대를 유지해야한다. 국가의 시민으로서의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고 존중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존중이 사라진 사회는 계속해서 코코넛에 맞아 죽어가는 사람들을 만들 것이다. 조금 더 사람다운 삶, 인간적인 삶, 살아갈만한 세상은 존중과 연대에서 나온다. 마지막으로 다니엘 블레이크의 항소문을 첨부한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보험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내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나는 개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나는 요구합니다. 당신이 나를 존중해 주기를. 나는 한 명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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