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근/파리/윤형근_ Yun Hyong-keun: Yun/Paris/Yun 》
윤형근 화백이 파리에서 머문 두 번의 작품시기를 조명하며
그의 예술세계를 살펴본다.
윤형근 화백의 첫 번째 파리 시기 / 1980년, 한국은 군사독재의 그늘 아래 있었다. 1980년 12월, 윤형근 화백은 혼란스러운 한국의 정세에 좌절하며 파리로 떠나, 약 1년 반 정도 파리에서 머무른다. '천지문(天地門)'은 그의 작품을 대변하는 언어이다. 하늘(천,天)을 상징하는 파란색(ultramarine)과 땅(지,地)을 상징하는 암갈색(Umber)을 혼합한 청다색을 수직으로 내려 긋고, 그 사이의 공간을 문(문,門)이라 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흙 빛깔이 좋아졌는지 잘 기억은 안난다. 또 나무 빛깔도 그렇다. (...)
오랜 세월에 찌들은 나무의 빛깔은 그야말로 미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
이 모두가 자연 그대로의 질감과 빛깔이 영원성을 지니고 있는 미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나는 내 그림도 그런 느낌을 표현하려고 애쓴다.
1977
-「윤형근의 기록」, PKM BOOKS, 2021
아침부터 작업.
역시 오래오래 그린 작품이 좋다.
밀도를 가지려면 두고두고 그리는 데서 쌓이는 것 같다.
1979. 2. 15
-「윤형근의 기록」, PKM BOOKS, 2021
윤형근 화백은 테레빈유로 희석한 안료를 사용해 며칠에서 몇 달 동안 여러 번 칠해 오묘하고 깊은 색을 만들었다. 마포에 물감이 스며들며 생긴 자연스러운 번짐은 동양화적인 느낌을 연출하기도 한다.
윤형근 화백의 두 번째 파리 시기 / 2002년, 윤형근 화백은 장 브롤리 갤러리 전시를 위해 3개월 간 파리에 머물렀다. 1991년 도널드 저니를 만나며, 더욱 구조적인 형태에 집중했다. 1980년 1차 파리 시기보다, 2002년 2차 파리 시기에는 대형 캠퍼스에서 더 깊고 진한 색으로, 그리고 힘 있게 표현된다.
유독 이 그림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가운데를 흑색으로 가득 채운 그림도 있었던 반면, 이 그림은 양 끝만 흑색으로 칠하고 가운데의 공간은 넓게 비어져있다. 빈 공간을 한참을 바라보는데, 왜인지 모를 편안하고 차분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나보다 더 큰 캔버스 앞에 가만히 또 고요히 빈 곳을 응시했다.
가득 차면 답답하고
텅 비면 심심하고 싱겁고.
이것도 저것도 다 좋을 수가 없구나.
무(無)에서 유(有)를 그린다는 것 이다지도 어렵구나.
1999. 8. 7
-「윤형근의 기록」, PKM BOOKS, 2021
윤형근 화백의 삶과 예술 작품에 대한 영상과 책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아카이브 존(Archive)에는 파리에서 지냈던 윤형근 화백의 사진, 드로잉 북, 엽서 등을 같이 볼 수 있다.
예술은 점점 사라져 가는 세상인 것 같다.
인간이 없어져 가는데 예술이 있을 수 있는가.
세상은 온통 속물로 변해 가는데.
속물은 더 한 속물을 낳고. 인간성은 황폐만 해 가는데.
그럼 속물의 예술만 남는 것일까.
1979. 2. 18
-「윤형근의 기록」, PKM BOOKS, 2021
윤형근 화백의 초기 작품을 보면, 스승이자 장인어른인 수화 김환기 선생님의 색과 조형을 많이 닮아있다. 그만큼 라이트 한 색과 자유분방한 형태가 돋보였는데, 어느 순간 어두운 색채로 변해갔다. 검은 물감을 칠하고, 또 칠하고 마치 수련을 하듯 그려온 선생님의 그림에는 심연의 고요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고요한 듯, 여러 물감 층위를 보고 있으면 소리 없이 요동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나는 그 좋아야 했던 20대 청춘을 악몽 속에서 지냈다.
그래서 다사롭고 고운 색채가 잠깐 사이에 사라지고 어둡고 쓰거운 빛깔로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에 따라 그 생의 자세가 다르기 마련이다. 나는 무엇이고 옳지 못한 것, 정직하지 못한 것을 보면 화가 난다.
(...) 쉬운 길, 가까운 길을 선택하면 예술은 나오지 않는다. 먼 길, 험난한 길을 택해야 자연 예술은 향기를 피운다.
1986. 9. 19
-「윤형근의 기록」, PKM BOOKS, 2021
위 전시를 보기 전, 선생님의 일생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선생님의 예술은 추상주의보다는 표현주의에 가까운 그림이라고 한다. 시대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인데, 굴곡진 한국사를 온전히 겪어온 선생님의 삶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삶과 예술의 일치를 추구한 선생님의 이념은 그림을 통해 그대로 느껴진다. 예술을 하기 전 인간이 바로 서야만, 그 진실된 품위가 그림에 반영되는 것이라 하셨다. 깊고 어두운 선생님의 그림에서 올곧은 진심을 느껴본다.
about exhibition.
《윤형근/파리/윤형근_ Yun Hyong-keun: Yun/Paris/Yun 》
PKM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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